김원복 (음악가)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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1. 본문
김원복(金元福, 1908년 7월 25일 ~ 2002년 3월 29일)은 대한민국의 피아노 연주자이자 교육자입니다. 한국 최초의 여성 피아니스트로 알려져 있으며, '한국 피아노계의 대모'로 불립니다.
생애 및 경력:
- 1908년 7월 25일 황해도 신천에서 출생했습니다.
- 아버지 김형준은 가곡 '봉선화'의 작사가이자 성악가였습니다.
- 4세 때 서울로 이주하여 성장했습니다.
- 9세에 아버지로부터 피아노를 처음 배웠고, 이화학당에서 선교사에게 지도를 받았습니다.
- 1926년 이화고등여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했습니다.
- 1930년 도쿄고등음악학원(현 도쿄음악대학) 피아노과를 졸업했습니다.
- 졸업 후 바이올리니스트 홍성유와 결혼했으나, 홍성유는 6년 만에 요절했습니다.
- 1935년 중앙보육학교 교수로, 1938년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로 부임했습니다.
- 1930년대 중반부터 홍난파, 이인선, 윤심덕 등과 함께 연주하며 활발한 활동을 펼쳤습니다.
- 광복 후 고려교향악단 피아노 주임을 맡았습니다.
- 1946년 서울대학교 음악대학의 전신인 경성음악학교 교수로 임용되었습니다,
- 1946년부터 1973년 정년퇴임할 때까지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교수로 재직하며 수많은 피아니스트를 양성했습니다.
- 1957년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이 되었습니다.
- 1973년 정년퇴임 후에도 연주 활동을 계속했습니다.
- 2002년 3월 29일 숙환으로 타계했습니다.
주요 업적:
- 우리나라 최초의 전문 피아니스트이자 최초의 여류 피아니스트입니다.
- 1920년대부터 1940년대까지 주요 음악회의 피아노 연주를 거의 독점하다시피 했습니다.
-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교수로 재직하며 백낙호, 이성균, 정은모, 김하경 등 많은 제자들을 길러냈습니다.
- 한국 피아노두오협회를 창설하여 피아노 연주계 활성화에 기여했습니다.
수상 내역:
- 대한민국 문화포장 (1962)
- 대한민국예술원상 (1965)
- 5월문예상
- 국민훈장 동백장 (1973)
-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(1976)
- 채동선음악상 (1984)
- 5·16민족상 (1990)
- 자랑스런 서울대인 (1999)
저서:
- 『음악가는 말한다』
기타:
- 일제 강점기 말기 친일 행적(조선음악협회 이사, 경성후생실내악단 단원)으로 인해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음악 부문에 포함되었습니다.
김원복 (음악가) - [인물]에 관한 문서 |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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기본 정보 | |
이름 | 김원복 |
출생일 | 1908년 7월 25일 |
출생지 | 대한제국 황해도 신천 |
사망일 | 2002년 4월 29일 |
사망지 | 대한민국 서울 강서구 우장산동 사저 |
직업 | 피아노 연주자 |
장르 | 서양 고전 음악 |
활동 시기 | 1930년 ~ 2002년 |
배우자 | 홍성유 |
가족 | 자녀는 2남 시숙부 홍난파(피아니스트 겸 작곡가)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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